담임목사 칼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

Author
admin
Date
2019-11-02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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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
요즘 세계적으로 급진적 좌파들이 세상을 요란하게 만들고 있다.
미국도 좌파들이 각계각층에서 정의와 진실을 뒤흔들고 있다.
주요 방송과 신문사들이 앞장을 서서 급진좌파들을 이끌어 간다.
그들의 목적은 정의도 진실도 아니다.
세상을 꺼꾸로 돌리어서라도 방송시청율 올리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문제는 좌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을 PC(Political Correctness) 좌파라고 부른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반사적 도전이라고 볼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의 정상적인 방법 보다는 비정상적인 방법을 통해서 목적을 이루려 한다.
문제는 좌파적 사고는 사회주의를 부르고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와 전체주의를 부른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지배계급을 위한 체제일 뿐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와 전체주의는 그들의 그럴듯한 이론과 상관없이 무슨 일이든지 목적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데 있다.
그래서 사회주의체제와 공산주의와 전체주의적 체제는 인민을 지배계급의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이요 도구로 여긴다.
그래서 인격을 완전히 무시한다.
목적 달성을 위해는 거짓말을 하고 사람을 죽이는 어떤 수단 방법도 수용하는 무서운 주장이다.
그래서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테러를 서슴치 않는다. 사람의 목숨을 목적을 이루는 수단과 도구로 여긴다.
그들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자와 전체주의 독재자들이다.
김일성과 레닌과 흐루시초프와 모택동이었다. 그들이 차베스와 마두로와 테러국가의 우두머리들이다.
그것이 세기의 악인 히틀러의 방식이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유태인들을 지구상에 전멸시켜도 된다는 생각 때문에 무려 유대인 6백만 명을 가스실에 집어넣고 독살을 시켰다.
모택동은 기독교가 공산주의 걸림돌이라며 기독교를 말살시켰다.
북한 공산주의자들도 목적을 위해서는 버마의 아웅산 사건이나 KAL기 격추사건 각종 테러사건 등 잔인한 만행을 서슴치 않았다.
이들은 다 물질중심주의와 외형 중심적인 사상으로부터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닉하게도 외모주의나 형식주의 그리고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 전체주의는 언제나 이율배반적이거나 겉과 속이 다른 거짓말로 포장을 한다는 사실이다.
현시대에 존재하는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과 전체주의자들이 지배하는 모든 국가가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다.
그들이 지배하는 나라 중에서 과연 어느 나라가 인류 보편적인 자유와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가? 없다.
그럴 수밖에 없다.
거짓과 속임수로 다스리니 진실이 없고 정의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신뢰관계가 공존하지 못한다.
그들은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른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도적적 기준이 없다.
그래서 자기합리화를 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을 떠 넘기는데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다.
거짓말로 선전선동을 하고 속임수를 써서 약속을 하고 어떤 나라로부터 이익을 챙겨 놓고 즉시 약속을 깨 버린다.
그리고 거짓말과 속임수는 그들의 전술전략이기 때문에 전쟁의 승리자로서 당연한 전략물자를 얻었다고 여긴다.
그리고 승리했다고 자축 파티를 즐긴다.

성경에 보면 변질된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말씀이 있다.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잠14:4)
옛날 시골에서 농사를 지은 분들은 소를 키웠다.
소는 재산이었다.
그리고 농사일에 매우 필요하다. 그러나 소를 키우면 고약한 냄새가 나고 쇠파리들이 들끓고 매일 마구간이 더럽혀진다.
매일 치워도 더럽다. 때로는 소를 키운 것을 후회하기도 하고 차라리 소가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요즘 유행한 PC좌파의 목적이다. 정상적인 사람의 목적은 소 그 자체이다.
소의 재산적 가치와 농사에 필요한 일꾼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와 전체주의 목적은 소가 방해가 되니까 없애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소가 구유를 더럽힌다고 해서 소를 없애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소가 없으면 누가 농사일을 돕겠는가?
막상 소를 없애면 얼마나 아쉽겠는가?
우리는 종종 이런 바보스러운 생각을 가끔 할 때가 있다.
우리의 시선이 소가 하는 일들, 소가 내게 갖는 의미, 소의 가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진 구유에 집중될 때,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아주 오래 전에 목회를 할 때 교회에서 매우 문제가 많은 성도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 간에 이간질을 해서 늘 교회를 시끄럽게 했다.
앞에서는 그럴듯한 말을 하지만 뒤에서는 뒤통수를 치기 때문에 고통을 당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의 경계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그분에게 한 가지 큰 장점이 있었는데 봉사의 일을 열심히 잘했다.
어느 날 교회의 리더들이 찾아와서 그 성도를 내보내 달라고 요청을 하며 그래야 교회가 평안하겠다고 했다.
얼마나 속상하고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싶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소가 없으면 마구간이 깨끗하겠지만 소로 말미암아 얻을 것이 많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모든 성도는 다 함께 안고가야 할 우리 몫이다.

1950년대 말 중국에서 벌어진 참새 박멸 운동이 바로 비슷한 경우이다.
마오쩌둥이 1958년 쓰촨성의 농촌을 시찰하다가 벼 이삭에 달라붙어 있는 참새떼를 쳐다보며 “저 참새떼들은 해로운 새들다.
저것들을 없애야 겠어.”라고 한마디 했다.
배고픈 인민들이 먹어야 할 곡식을 참새가 쪼아먹자 화가 나서 던진 말인데 그 파장은 실로 엄청났다.
마오쩌둥의 한마디에 “참새 섬멸 총지휘부”가 만들어졌다.
자칭 지식인들은 “스촨성에 참새가 사라지면 70만명이 먹을 수 있는 곡식을 더 수확하게 된다”며 바람을 잡았고 대대적인 소탕작전이 벌어졌다. 다음 해가 되자 곡식 수확량이 늘어나야 할 텐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참새가 사라지자 메뚜기를 비롯한 해충이 창궐했고 농작물은 초토화됐다.
대흉년이 들었다.
1958년부터 3년 동안 중국인 3천만명이 굶어 죽었는데 마오쩌둥 한마디가 불러온 참사였다.
해충의 공격을 받아 농작물이 쑥대밭이 되자 다급해진 마오쩌둥은 소련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고는 시베리아 벌판에서 참새 20만마리를 잡아다가 중국 각지에 풀어놓았다.
"해로운 새, 참새를 때려잡자"고 쫓아다니던 사람들이 곧바로 "이로운 새, 참새를 잡아오자"며 시베리아 벌판을 헤매고 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얼마나 황당한가. 참새를 둘러싼 생태계를 이해하지 못한 채 무작정 때려잡고 본 결과다.
이것이 좌파들의 사고방식이다.
그러면 망한다.
그렇게해서 잘되는 나라가 어디있는가?
왜 그럴까?
방식이 잘 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고방식, 그들의 정치방식, 그들의 삶의 방식이 잘 못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방식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방식은 나를 먼저 생각하지 말고 상대방을 배려하고 남을 이롭게 해야 한다.
그러면 내가 잘 되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