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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r Scriptura(2)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Solar Scriptura(2)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이사야 55:6-12
이 세상에 거룩한 사람이 있을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성경에 의하면 거룩한 사람은 이 땅에 아무도 없다.
인간은 거룩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살전 4:3)
어떤 면에서 구원받았다는 말은 거룩하게 되었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우리가 거룩해지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딤전 4:5)”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입으로 기도하며 살면 거룩하여 진다는 뜻이다.
인간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거룩하다는 뜻이다.
벧전 1:15에 보면,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명령이다.
거룩한 말씀이 내 안에 살아 있으면 내가 거룩해져 가는 것이다.
거룩한 말씀을 자꾸 들으면 그 말씀이 믿음이 생겨서 내 안에서 나를 거룩해져 가도록 도우신다.
한자로 거룩할 성(聖)은 참 의미가 깊다.
耳(귀 이) + 口(입 구) + 壬(짊어지다는 뜻의 임금 임) 세 글자가 합쳐진 것이다.
세상 죄를 짊어지신(壬) 임금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수 같은 말씀을 듣고(耳) 전하는(口) 것이 거룩한(聖) 것임을 형상화 한 한자다.
세상 죄를 짊어지신 왕의 말씀을 듣고 전하는 것이 거룩한 삶이다.
행 16:32에 보면 거룩해 지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뭘 전했는가?
“주의 말씀을 전하였다.”
“주의 말씀”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복음의 말씀이다.
복음을 입으로 전하여 그 사람과 그 집이 다 듣고 거룩해졌다는 뜻이다.
온 가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입으로 고백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전하면 그 집에 구원을 받게 된다는 말이다.
거룩한 삶은 말씀을 듣고 입으로 고백하며 전하는 삶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거룩해져 가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영어의 '종교(religion)'라는 단어는 라틴어의 “religare”라는 단어에서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한다. 이 말은 '단단하게 묶는다(to bind strongly)'는 뜻이다.
이 말은 '하나님과 인간의 단단한 결합'이란 뜻으로 발전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하나님과 성도들 간의 확고한 일치' 됨이다.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됨이 세례이다.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고난당하고 함께 피흘리고 죽음에서 하나됨이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예수님과 내가 하나 되는 자리이다.
거기서 함께 고난 당하고, 함께 피를 흘리고, 함께 죽었다.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됨이 부활이다.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됨이 구원이다.
그래서 구원도 거룩함도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될 때 가능해 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신앙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됨을
체험할 수 있을까?'
답은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집 나간 탕자가 아버지께로 되돌아왔을 때 아버지와 하나되었다.
손에 가락지를 끼워 새로운 사명을 받고, 새옷을 입고 새로운 신분을 얻고, 아버지와 함께 거룩해져 가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이러한 믿음의 체험을 성(聖)스럽다는 '거룩함'(numinous)의 체험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거룩해져가는 성화는 초월적인 존재가 되어져 가는 과정이라는 뜻이다.
즉, 세속적인 것에 삶의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따라간다는 의미가 숨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거룩한 체험을 한다는 것은 이러한 초월성을 체험한다는 말이다.
초월성은 과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계산적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일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거룩과 완전한 영원한 초월성은 오직 한 번 경험할 수 있다.
예수님 재림 때 부활을 통해서이다.
거듭남도 재림도 부활도 모두 신적인 초월성이다.
다른 한편으로 거룩함이란 절대성을 가진다.
완전한 거룩자 앞에서는 아두도 아무것도 부인하거나 거부할 수 없다.
아무리 큰 세상의 권세자라도 백성들 앞에 완전한 절대성을 가질 수 없다.
백성들이 완전히 굴북하지 않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권세자 앞에서 불평하고 속이고 회피한다.
그러나 완전한 가룩자 앞에 설 때 아무도 거부하지 못한 절대적 권세 앞에 무릎을 꿇고 떨지 않을 수 없다.
아브라함이 여호와 앞에서 떨었다.
모세가 가시떨기 나무에 불로 나타나신 여호와 앞에서 엎드려저 죽은듯이 떨었다.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의 옷자락끝의 영광 앞에서 엎드려져 떨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정오의 햇빛 보다 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신 예수님 앞에서 엎드려저 죽은듯이 떨었다.
하나님의 영광은 거룩의 영광이다.
완전한 거룩이 곧 영광이다.
거룩은 곧 두려움이다.
왜?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완전한 거룩성 앞에 두려울 수 밖에 없다.
영광스러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그 영광으로 오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실 때 그 영광과 권능 앞에 해가 빛을 잃고 별들이 권능으로 떨어지고 만물이 채질에 녹으며 그 영광스러운 심판대 앞에서 모든 각인의 입술이 숨김없이 직고하게 될 것이다(롬 14:12, 벧전 4:5)
절대성을 가진 자는 오직 완전한 거룩자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절대적 권위자이시며 가장 높으신 영광이시다.
집의 가장 높은 곳은 용마루라고 한다.
가장 높은 산의 정상을 산무루라고 한다.
“마루”는 반드시 땅보다 높은 곳이어야 한다.
'마루'는 반드시 땅에서 떨어져야 한다.
공간이 있어야 한다.
구별되어야 한다.
공중 위에 깔아 놓은 것을 말할 때 비로소 '마루'라고 한다.
그러므로 '마루'라는 것은 그 어떤 것을 분리하는 선이다.
우리가 산마루에 올라가면 우리는 산마루에 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안에 있게 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것이 거룩한 삶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이러한 거룩한 체험, 으뜸가는 가르침을 따라가는가 반문해 보아야 한다.
교회는 단지 건물이 되었으며, 사람들이 모이는 단순한 집단이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교회게 거룩성이 사라져 간다.
모든 교인들이 앉아서 하는 말들이 다 똑 같다.
오늘 설교가 내 맘에 안든다.
저 설교는 내가 원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저 말씀은 내가 싫어하는 말씀이다.
저 말씀은 내가 다 아는 말이다.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내 말을 안 듣는다.
이렇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저렇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누구증심인가?
내 중심이다.
다 내가 하나님이 되어 버렸다.
그건 생명없는 종교생활이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
종교란 생명없는 우상에게 내가 원하는 대로 나를 위해서 복을 주시고 내가 원하는 소원대로 해 달라고 돈을 내고 주문을 외고 복을 받기 위해서 천번 절하는 것이다.
생명없는 자에게 가면 생명없는자가 될 뿐이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신앙의 생활은 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한다.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내 기분을 좋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내 맘에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맘에 들어야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어야 한다.
내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나의 영광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다.
나는 죽어야 한다.
나는 없어져야 한다.
대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야 한다.
어느 은퇴 목사가 오랫동안 시무한 교회에서 오랜만에 설교를 하게 되었다.
그 교회는 번잡한 두 큰길이 만나는 시내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 한 코너에는 또한, 아주 유명한 오래된 식당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이 노(老) 목사는 설교를 하면서 교인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그 식당은 수 십년 다닌 단골이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만약 이 사거리에 서 있는 우리 교회와 저 건너편의 식당이 다 헐리게 된다면, 여러분들은 이 둘 중에 어느 것을 더 그리워할 것 같습니까?"
이 질문 앞에 교인들은 얼른 대접을 못하고 망설이면서 옆사람들을 마주보고 서로 중얼거리
기만 했다.
노 목사는 재차 급히 물었다.
"어느 것이 더 그리울 것 같으세요? 교회요 식당이요?"
이 재촉하는 질문 앞에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나오는 대답은 "솔직히 식당이요!"라고 했는 것이다.
이 간단한 이야기에서 우리는 느끼는 바가 있다.
진실로 우리들의 교회가 사람들에게 실제적으로 도움을 주는 곳인가?
식당은 오랫동안 거리에 빈번하게 오고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일을 했다.
그렇다면 교회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오래된 유명한 식당 자리를 지나면서 옛날 단골식당을 그리워하듯이 그곳을 지나면서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는 교회인가?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는 사람들을 위해서 서 있으면서도 사람들과는 거리가 먼 외면당하고 있지는 아닌지 모르겠다.
단지 교회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지는 않는가?
내 주장을 내 세우고 내 뜻을 관철하고 내 만족을 위하여 서로 다투고 파벌이 되어 으르렁 거리는 교회는 이미 사명을 잃어버렸다는 증거이다.
본질은 사라지고 모습만 남아 있다.
사람들의 허기지고 목마른 영적인 만족을 채워주는 곳이 되어야 한다.
선교(Mission)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선교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사명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두 개의 다른 뜻이 있음애도 불구하고 한 단어로 쓰이는가?
결국 선교는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의 일이 곧 사명이기 때문에다.
사명이 성교이고 선교가 사명이다.
원래 선교(Mission)라는 헬라어의 뜻은 "하나님 자신이 세상의 한복판에 스스로 서 계시다"는 말이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선교를 위해서 세상 한복판에 서 계신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의 한 복판에 서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존재한다.
오래 전 김지하 시인이 쓴 '구리 이순신'이라는 글이 생각난다.
이 희곡의 배경은 서울의 세종로 한복판에 서 있는 구리로 만든 커다란 이순신 동상 앞이다.
바람 부는 추운 겨울 밤이 되면, 이 동상 앞에 거지, 고아, 집 없는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말없이 큰 칼차고 있는 거대한 이순신 동상에게 하소연을 합니다.
도대체 "당신은 거기서 칼만 차고 세상을 호령하듯이 내려다보면 다요?"
"당신의 그 큰 구리를 팔면 우리의 허기진 창자를 넉넉히 채우고 남을텐데 말이요" 하면서 매일 같이 푸념을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상 아래서 잠을 자던 사람들은 위에서 빗방을 같은 것이 뚝뚝 떨어져서 자세히 위를 쳐다 보았더니 이순신 장군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 구리 이순신 장군은 눈물을 흘리면서 거지들과 고아들과 홈레스(Homeless)들에게 이렇게 하소연 하더라는 것이었다.
"여보시오, 나에게서 이 무거운 구리 갑옷을 벗겨주시오. 나를 자유롭게 좀 해주시오. 이 구리 갑옷이 너무 크고 무거워서 왜적이 독도를 공격해도 칼을 들고 나가 싸울수가 없단 말이오.”
본질은 사라지고 외형만 거대하게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구리갑옷을 입고 외형만 그리스도인이지 실재로 그리스도인의 본질은 다 하지 못한 사람들은 아닌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혹시 오늘날 아름답고 웅대한 교회당을 이루며 신앙생활하는 것이 우리의 주님께 무거운 구리 옷으로 치장시켜드리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외형만 그리스도인의 구리 갑옷을 입고 있지는 않는가?
그와 같은 모습을 지닌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만 고집하고 있다"(막 7:8)고 하셨다.
전통의 구리갑옷, 형식의 구리갑옷을 벗어 버려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시며 그 무거운 구리옷을 벗겨달라고 하시지 않겠는가?
예수님의 말씀에 교회는 산 위의 동네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그리고 자기의 백성들에게 "진정 너희들의 세상의 산마루에 서 있으라"고 간곡하게 부탁하지 않겠는가?
땅에서 떨어진 '산마루' 위에 앉아 있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산마루에 잡리잡고 빛을 비취고 있으므로 숨기지 못하는 산동네이며 길 잃은 자들의 이정표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 우리를 어떻게 초청하고 계시는가?
6-7절,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지금은 은혜받을 때이다.
지금은 여호와를 만날 수 있을 만한 때이다.
지금은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때이다.
지금은 “누구든지 주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때이다”(롬 10:13, 행 2:21, 요엘 2:32)
그러나 때가 지나면 그분을 만나고 싶어도 만날수 없음을 상기해야 한다.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이다.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곧 때가 지나리라는 뜻이다.
젊어서는 일할 때이다.
나이가 들면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있게 된다.
젊어서 기도 많이 할 때이다.
나이가 들면 기도하고 싶어도 기도할 수 없게 된다.
봉사도 젊어서 해야 한다.
나이가 들면 봉사를 하고 싶어도 몸이 말이듣지 않아 할 수 없게 된다.
어느 연세 지긋하신 권사님께서 늘 만나면 하신 말씀이 있다.
“젊어서 기도 많이하고 봉사 많이 할걸 이제는 하고 싶어도 몸이 말이 안 들어요. 그것이 가장 후회스러워요.”
계속해서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시는가?
“가까이 계실 때 그를 부르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자비에 너 자신 전체를 던지라”는 뜻이다.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
말로만 소리쳐 부르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 온 몸과 우리의 삶 전체를 다 내어 던지라”는 뜻이다.
아모스 5: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골로새서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마태복음 7: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7절,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여기서 악인은 그 '행실'에 있어서 공개적으로 죄를 범하는 자이다.
불의한 자는 스스로는 범죄자로 생각하지 않으나 그 내면적 실상이 죄악된 자를 가리킨다.
회개하라는 것이다.
'그의 행실을 버림으로' 시작하여 결국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용서를 받을 수 있다.
'여호와를 그의 하나님으로 섬기는'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호세아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께 돌아가면 사랑을 받게 된다.
하나님은 거룩이시라 하나님께로 돌아가며느 거룩하게 변화를 받게 된다.
신명기 30:9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이 율법책에 기록된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가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