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칼럼

(추수감사절): 불평보다는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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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min
Date
2019-11-27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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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없는 서른 살에 아프리카의 Nigeria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Nigeria 시내를 벗어나 자동차로 비포장도로를 3-4시간을 흙먼지 날리며 달려 숲이 우거진 원주민들이 사는 깊은 정글속을 찾아 갔다. 거기서 하루 밤을 자야 하는데 호텔은 물론 인적조차 없는 곳이었다. 안내자를 통해서 그곳 추장을 찾아 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손에 긴 창을 들고 손방패를 앞세우고 얼굴에는 검붉은 색칠을 한 인디언 30여명이 소리를 지르며 나타났다. 그들이 보기에 이상에게 생긴 동양 사람을 보고 알 수 없는 언어로 합창을 하면서 발을 둥둥 굴리기도 하고 창을 쿵쿵 땅바닥에 치면서 주위를 빙빙 돌기 시작했다. 긴장된 순간이었다. 이러다가 저들에게 잡혀 먹지나 않나 잠시 근심이 스쳤다. 그 때 동행한 안내자가 그들에게 추장을 만나러 왔다고 했다. 그러자 그 중에서 가장 나이가 들어 보인 사람이 추장이라고 했다. 날이 저물어 가니 잠 잘 곳이 있으냐고 물었더니 최고급 호텔이 있다고 하면서 따라오라고 했다. 깊은 정글속에 30-40m나 되는 아주 큰 야자수 꼭대기에 까치집처럼 나뭇가지를 엮어 지은 방이 있었다. 그곳이 가장 좋은 최고급 호텔이라는 것이다. 까치집 호텔비 $20과 추장에게 드릴 사례비 $20을 합쳐 $40을 지불했다.
어쨌든 밧줄로 엮어 만든 사다리를 타고 한참 동안 나무 위로 올라가서 잠을 청하는데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다. 지붕 위에 원숭이들이 떼를 지어 모여서 괴성을 질러 데면서 까치집을 마구 흔들어 데질 않나 얼마나 시끄럽고 무섭기도 하던지 잠을 잘 수 없었다. 아침 햇살에 잠이 깨어 밧줄 사닥다리를 타고 내려오는데 원숭이들이 갑자기 우루루 달려들었다. 알고 보니 먹을 걸 달라는 것이었다. 바로 그 때 추장이 동행한 안내자와 함께 바나나 한 바구니를 들고 왔다. 원숭이들에게 하나씩 나눠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원숭이들이 바나나를 받아갈 때 공손히 받아가는 것이 아니라 확 빼았듯이 가로채 도망을 가는 것이었다. 열이면 열 모두 그렇게 하는 거였다. 하도 이상해서 추장에게 왜 저렇게 빼았듯이 확 낚아 채 가는 거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그게 동물과 사람이 다른 점이죠. 동물은 전혀 감사를 몰라요. 한 평생 바나나를 나누어 주어도 한번도 감사를 몰아요.”
그들은 감사를 모르면서도 한 번 바나나를 주면 밤이든 낮이든 배가 고프면 찾아와서 바나나를 더 내 놓으라고 떼거지를 쓰며 몰려다니고, 잠자리까지 마구 흔들어 댄다. 베풀면 베풀수록 의기양양이다. 정말 감사를 모르는 작자들이었다. 그것이 동물의 세계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참된 신앙의 모습이란 무엇일까? 그리스도인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할까?
골로새서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골3:12) 여기에 보면 성도의 존재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성도는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받았다. 그리고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는 희생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다. 나아가 끝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신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아 선지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렘1:5)
어머니의 배 속에 생기기 전에 우릴 이미 아셨다. 어머니의 태중에서 탄생하기 전에 이미 거룩한 성도로 구별하셨다. 누구 때문에 그렇게 하셨을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 때문이었다.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엡3:11)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보배로운 그리스도의 피로 값없이 구원받고 하늘 보다 높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었으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골로새서는 두 가지로 말씀하신다. 첫번째로 “불평불만을 가지지 말라”(골3:13)고 하신다. 불평은 감사의 반대말이다. 불평불만은 마음 속에 감사가 없기 때문이다. 불평불만은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이다. 본문에 보면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골3:13)이라고 하신다. 불만을 헬라어로 “멤포마이”라고 한다. 이 말은 “비난한다”, “불평한다”, “원망한다”, 남 탓을 한다” 혹은 “불편한 관계를 가진다”는 뜻이다. 시편 37:8에 보면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고 한다. 공동번역은 “불평하지 마라. 자신에게 해로울 뿐이다.” 그러므로 불평은 자기자신을 망가뜨리는 일이다.
그렇다. 불평불만은 나에게 조금도 유익이 없다. 불평의 소리를 하면 누가 가장 먼저 듣는가?내가 가장 먼저 듣는다. 믿음의 말을 하면 누가 가장 먼저 듣는가? 내가 가장 먼저 듣는다. 어떤 사람은 이래도 저래도 무조건 불평부터 시작하는 사람이 있다. 모든 것이 불만스럽다. 그건 누가 잘 못해서가 아니라 결국 자기 문제라는 걸 알아야 한다. 그것이 그 사람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두번째로 “불평대신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3:15)고 하신다. “감사하다”의 헬라어 “유카리스테오”는 “복되다”는 뜻의 “유”와 “기쁨”이라는 “카라”와 “은혜”라는 “카리스”가 합쳐진 단어다. 전혀 자격이 없는데 주신 은혜가 너무 크고 기뻐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다.
한국의 매우 존경하는 훌륭한 어느 목사님이 토요일 밤 늦게까지 주일 설교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밤중에 누가 교회문을 두들겼다. 가슴이 철렁했다. 교인중에 누가 급한일이 생겼나 싶었다.
문을 열어 주려고 나가 보니까 병원에 입원한 안수 집사였다. 아내와 함께 왔다.
"어떻게 이 밤중에 교회에 나오십니까?"
"목사님, 수술을 하고 방귀가 나와서 지금 병원에서 퇴원하는 길입니다. 제가 죽었다가 다시 생명을 찾았는데 그냥 집으로 바로 갈 수가 없어서요. 그래서 지금 교회에 나왔습니다. 감사 기도하고 가려고요…”
그 말을 들으니 “눈물이 핑 돌더라”고 했다. 목회자는 그런 성도를 보면 가장 감격스럽고 보람을 느낀다. 그래서 성전에 들어가서 두 부부와 함께 감사의 기도를 간절히 드렸다고 한다. 허구한날 실없이 나오는 방귀도 때로는 그렇게 감사할 때가 있다. 수술을 해 보신분들은 알지만 만일 수술을 받고 방귀가 안 나오면 재수술을 받아야 한다. 수술을 받고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가스가 나오면 아, 살았다고, 방귀가 나와서 고맙다고 이제 퇴원을 해도 된다고 “방귀 축하를 드린다”고 전화를 하기도 한다. 그렇다. 농무가 마치 추수의 열매를 드림과 같이 감사는 신앙의 마지막 성숙이다. 진정한 감사는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감사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