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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r Scriptura(1)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
Sola Scriptura(1) 즐거운 길 사는 길
이사야 55:1-4
1995년 홍콩의 가난한 동네에서 태어나 17세의 나이에 홀홀 단신의 몸으로 미국에 유학을 왔던 잔 첸(John Chen)이라는 소년이 있었다.
브라운 대학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졸업하고 California State(켈리포니아 주립) 공대 대학원을 졸업한 후 다시 고국 땅 홍콩으로 건너가려고 했지만, 당시 홍콩에서는 IT 기업이 없었기 때문에 미국에 눌러 앉아 생존을 위해서 IT 산업체 말단 사원으로 입사를 했다.
아시안의 작은 사람 John Chen은 말단 직원으로 일을 하면서 점점 인정을 받게 되었고 그의 탁월함이 다른 기업체와 외부에까지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그가 글로발 IT 기업 "사이베이스"의 최고 경영 자 (CEO)로 발탁된 것이다.
당시 "사이베이스"는 심각한 재정적자로 문을 닫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말 그대로 부도 바로 직전이었다.
전임자가 부도가 날 것을 예상하고 사임을 했기 때문에 마지막 최후의 보루로 그를 발탁한 것이었다.
그는 그야말로 위험한 시험대에 올랐다.
그런 어려운 상황가운데서 "사이베이스"의 CEO가 된 것이다.
만약 부도가 나면 모든 책임을 져야했다.
첫 출근하던 바로 그날부터 그는 "사이베이스"를 흑자 경영으로 이끌기 위한 마스터 플랜(Master Plan)을 새우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무실에서 먹고 자면서 회사를 살릴 전략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그런 투지의 결과로 그때부터 지금까지 무려 21동안 해마다 연속해서 수익의 배가를 올려놓고 있다고 한다.
John Chen 사장이 CEO로 일하면서 가장 첫 날 가장 첫 번째로 전 회사원에게 강조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부임 첫날부터 "죽겠다" "못하겠다" "안된다"는 말을 절대하지 말라고 전회사원들에게 특별지시를 했다고 한다.
그 대신 모든 업무에 있어서 "할 수 있다" "방안을 찾자"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말로 대신 바꾸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절대로 못하겠다는 말을 하지 말라"였다.
왜 그랬을까?
당시에 “사이베이스”의 모든 사원들은 사기가 죽어 있었고 일할 생각은 않고 언제 부도날지 모르는 회사 대신에 다른 회사를 알아보려고 인터넷(Internet Job site)을 뒤지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런 분위기로는 결코 회사가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John Chen 사장은 그런 그들의 부정적인 생각과 말을 바꾸어 주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렇다.
말에는 능력이 있다.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된다는 말을 뿌리면 되어져 가는 열매를 거둘 수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잖는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잘되기를 바란다면 제발 앞으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부정적인 말을 입 밖에도 내지 말아야 한다.
원망의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아야 한다.
누구에게든지 불평의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자.
그런 말들은 결국 원망과 불평의 열매만 가득 거둘 뿐이다.
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말고 할 수 있다고 말하자.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의 생각의 열매이다.
말은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의 결과이다.
말은 말하는 사람의 인격의 열매다.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인격을 알 수 있다.
사람의 말은 말하는 대로 사람의 행동을 이끌어간다.
말이 인생을 이끌어 간다는 뜻이다.
말이 행동을 만들기 때문이다.
믿음의 생각을 하면 믿음의 말을 하게 된다.
믿음의 말을 하면 믿음의 행동을 하게 된다.
믿음의 행동을 하면 믿음 있는 좋은 열매를 맺는 인생이 될 것이다.
이처럼 사람의 말에도 능력이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에는 얼마나 큰 능력이 있겠는가?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히 1:3)
“그의 능력의 말씀”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 1:3)
말씀이 능력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에 대한 목마름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목마름이 있으면 참만족을 얻을 수 있다
옛말에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했다.
'목마른'은 그 무엇을 강하게 소원하는, 특히 영적 구원을 그렇게 사모하는 자들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시 42:2;63:1;143:6;요 7:37).
목마름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육체의 목마름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에서 물이 없어 목마른 생활을 했다.
수가성의 우물가의 여인의 모습이 그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그녀는 인생의 행복에 목마름으로 6번째의 남자와 살았지만 결코 목마름의 갈증을 해결할 수 없었다.
육신의 목마름은 채워도 채워도 채울 수 없다.
그리고 영적인 목마름이다.
주님께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에게 축복을 선포하셨을 때 바로 본 구절을 염두에 두셨다(마 5:6).
영적인 목마름은 배가 부른 만족을 주신다고 하셨다.
그러나 영적인 만족을 얻으면 육신의 목마름을 채울 수 있다.
이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라고 말씀하셨다.
영적인 것을 먼저 찾으면 육적인 것들은 도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대한 초청을 하고 계신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1)
여기서 물은 영적인 생명수를 말한다.
육신을 위한 물은 먹어도 먹어도 다시 목이 마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적인 생명수를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4장에서 같은 말씀을 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10)
그 말을 들은 여인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께 질문을 한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12)
에수님의 대답을 들어 보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3-14)
이 때 수가성의 여인은 놀라운 고백을 한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15)
여인의 고백은 자신이 목마른 여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목마름에 참만족을 얻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다시는 물 길으러 오지 않게 영원히 목마름을 해결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이런 목마른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위대한 초청을 하신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1)
특히 여기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는 말씀은 육신의 위한 물이 아니라 영적인 생수를 사라는 뜻이다.
이것은 복음을 만한다.
“포도주”는 기쁨을 주는 성령을 말하고 “젖”은 생명을 공급하는 말씀이다.
성령의 충만함과 말씀의 충만함을 가지면 그 어떤 것보다 더 충만한 만족을 얻을 수 있다.
생명을 지속시키는 데 필요한 물뿐 아니라 활기와 영양을 공급하는 포도주와 우유가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구원의 복음이 주는 축복의 다양함과 풍성함을 시사한다(아 5:1;요 7:37).
그러면서 육신적인 양식만을 찾고 구하는 사람들을 행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2)
인간은 행복을 구하기 위하여 노력하지만 실망하고 만다는 사실을 풍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빵은 생명을 지탱케 하는 수단이다.
그래서 인간은 빵을 얻기 위해 돈을 버는데, 어리석은 인간은 빵 아닌 것을 사기 위해 헛되이 돈을 낭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 구절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육신을 살지우는 빵이 아니라 영혼을 살지우는 빵이다.
영식에는 두 가지의 영식이 있다.
하나는 육신을 위한 매일 먹는 양식이다.
다른 하나는 영적인 양식이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40일 금식기도를 하시고 난 후 마귀의 시험을 받으실 때 마귀를 하나님의 말씀의 검으로 물리치셨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3)
공생애를 영적인 일을 못하게 하고 육적인 일을 하려 실패하기 하려고 한 것이다.
예수님을 육신적인 떡으로 살게 하려고 유혹한 것이다.
마귀는 우리에게 육신으로만 살게 하려고 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8:3)
이 말씀은 이미 구약에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신 것이다.
신명기 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의 양식으로만 살 수 없는 게 인간이다.
영혼이 먼저 되면 육신이 잘 된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3서 1:2)
인간의 노력으로 만족을 얻고 살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그 사람은 결코 그것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만족을 얻고 살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 주신다.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즐거움을 얻을 것이니라
참만족을 얻을 수 있는 대인 첫 번째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라이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2)
청종(聽從)이라는 말은 “이르는 말을 듣고 잘 좇는다”는 뜻이다.
‘청종한다’는 것은 ‘청(聽), 듣는 것’과 ‘종(從), 좇아 행하는 것’이 함께 결합되어 만들어진 단어다.
청종에는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듣는 것에 문제가 생기면 행하는 것에도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래서 듣는 것을 잘 듣고, 그리고 그것을 행하여야 청종이 되는 것이다.
성경에는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라고 하고 있다.
“내 백성이 나를 청종하며 이스라엘이 내 도 행하기를 원하노라”(시81:13).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 하는 귀에 금 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잠25:1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사55:2).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대로 행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말씀대로 이루신다.
‘청종한다’의 히브리어는 ‘다바르’이다.
다바르는 ‘미드바르’의 동사형이다.
미드바르는 히브리어로 광야라는 뜻이다.
그리고 광야, 미드바르에서 나온 말로 ‘드바르’란 단어가 있다.
그것은 성막에 있는 지성소(至聖所)를 일컫는다.
그래서 광야를 뜻하는 미드바르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뜻인 다바르와 지성소를 뜻하는 드바르가 모두 한 단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청종의 의미를 더욱 확실히 알게 해주고 있다.
즉 ‘청종은 광야를 통과하는 동안 지성소에서 나오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다’라고 할 수가 있다.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삶의 중심에 성막을 모시고 살았다.
성막은 바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곳이요,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곳이요, 은혜를 받는 곳이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 곳이다.
반면에 광야는 문명의 이기가 아무것도 없는 곳이다.
광야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만을 청종해야 살아갈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아무도 없는 광야로 나갔다.
거기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스데반집사는 사도행전 7장에서,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의 40년 광야의 모습을 ‘광야교회’라고 하였다.
그러면 우리도 천국을 소망하고 천국 가기 위해 준비하는 이 세상의 삶을 ‘광야’이다.
세상의 신앙생활은 광야교회라 할 수가 있다.
그러면 모세와 함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청종했다.그렇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 거친 광야를 걷게 하시는 목적이 무엇일까?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특별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토록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왜 당신의 자녀들에게 고난과 슬픔과 역경을 주셔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될것이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가 40년 광야생활을 끝내고 이제 요단강 건너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고백설교를 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신8:2).
여기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목적이 바로 말씀을 청종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다.
천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키는 곳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아무도 천국에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말씀을 지키는 훈련을 해야만 한다.
말씀을 지키는 훈련을 하는 곳이 바로 광야교회 과정이다.
신명기의 말씀은 광야 40년을 마치기 직전, 새로운 세대를 위한 말씀이다.
그리고 그 앞에 광야 40년의 생활을 회고하며 기록한 책이 민수기이다.
그 민수기의 원래 이름은 ‘광야에서’이다.
애굽을 떠나 40년간의 광야생활의 여정을 기록한 것이다.
거기에 나타난 광야는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는 곳이었다.
오직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고 반석에서 생수가 터져야만 살 수가 있는 곳이었다.
거기는 볼 것도, 재미있는 것도, 의지할 곳도 없는 곳이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빨리 거기를 벗어나는 길밖에 없는 곳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 광야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의지할 것도, 즐길 것도 아무 것도 없기에 오로지 하늘만을 바라보며 하늘로부터 임하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 시대의 지성소는 어디인가?
이 시대의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에서 바로 들리는가?
이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어느 시인이 광야의 길에서 “직선과 곡선”을 노래한 바 있다.
“신(神)은 곡선을, 인간은 직선을 낳는다.
곡선이 어머니라면 직선은 자녀다.
곡선은 부드럽지만 직선은 부드러움이 없다.
곡선은 둘레를 보며 움직이고 화합한다.
직선은 앞만 보는 고정이고 냉혹하다.
직선은 목표를 향해 가고 곡선은 원점을 향해서 간다.
사람이 태어나서 늙는다는 건 아기로 회귀하는 원주를 도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직선의 길이 아닌 곡선의 길로 인도하신다.
예수 믿는다고 즉시 거룩하게 된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긴 성화의 단계를 건쳐 거룩해져 갈 뿐이다.
실패를 겪어서 성공의 길로, 고통을 통해서 행복의 뜰로, 어둠을 지나서 빛의 광야로, 겨울을 지나서 봄으로 가게 인도하신다.
천국으로 가는 길은 직선이 아니라 과정을 거쳐가도록 하셨다.
당신은 지금 직선의 길을 가고 있는가, 아니면 곡선의 길을 가고 있는가?
과정이라는 곡선 없이 직선으로 가려고 하면 반드시 실패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에 청종치 않는 이스라엘 백성을 2개월 정도면 갈 수 있는 길을 40년을 걷게 하셨다.
왜?
직선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결코 가나안 땅을 차지하지 못할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면 우리에게 주실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인가?
2절,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무슨 말인가?
정말 좋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정말 즐거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 있어서 우리를 살리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어서 우리를 치료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력이 있어서 우리를 새롭게 만들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형통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주신다.
“그름진 것”은 풍성한 부와 재물을 뜻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영혼이 살리라
3절,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약속들을 믿고 영접하면 구원을 얻게 된다는 뜻이다.
이 구원의 약속은 이미 다윗왕에게 하신 언약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하신 언약에 매어 계신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하신 언약을 지키실 수 밖에 없다.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고 하신 그 언약은 도대체 어떤 언약인가?
4-5절,
“보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인으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로 삼았나니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네가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로 달려올 것은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는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다윗은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메시야를 다윗의 후손 중에서 주실 것이며, 그 메시야가 오시면 알지 못하는 나라가 나타날 것이다.
바로 그분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이시다.
그 알지 못하는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난 천국백성들이며 하나님 나라이여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거룩하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통하여 부르신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그 약속은 취소될 수도, 실패하게 될 수도 없는 약속이었다(삼하 7:15,16;시 89:2-4,28,29,34-36;고후 1:8-20).
바울은 그의 전도 여행 중 안디옥에서 행한 연설 중에서 이것을 증명하였다 :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행 13:34).
다윗이 하나님께 받았던 약속은 메시야가 고난당하여 죽임을 당하실 것이지만 끝내는 부활하여 영원히 통치하실 것이라는 내용이었는데 그것은 결코 변경될 수 없는 약속이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대로 2천년 전에 베들레헴의 말구유에서 탄생하셨다.
동방박사 세 사람 외에는 아무도 우리의 구세주를 영접하지 않았다.
세상에 오실 때 몸을 풀 곳이 없어 말의 먹이통에서 태어나셨다.
아무도 그를 알지 못했다.
요한복음 1:11-13,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
그분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이 하나님이시다.
그 말씀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
그 말씀이 인간이 되어 우리를 대신하여 대속의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악을 씻으셨다.
그 말씀이 인간이 되어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의 십자가를 대신 지시고 우리에게 저주 대신축복을 주셨다.
그 말씀이 인간이 되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의 값을 대신하여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주셨다.
능력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렇다.
말씀은 능력이다.
말씀은 생명이다.
말씀은 구원이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