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칼럼

인간의 언어(言語)에는 능력(能力)이 있다

Author
admin
Date
2017-07-11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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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언어(言語)에는 능력(能力)이 있다
인간의 언어에는 능력이 있다. 말 한마디로 평생 어두운 고통속에서 살기도 하고 말 한 마디로 꿈과 용기를 가지고 성공기도 한다. 언어는 통치의 수단이며 소통의 수단이다. 왕의 한 마디 말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인간이 이렇게 언어의 능력을 가진데는 분명한 내력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 “빛이 있으라”하시니 흑암의 깊음 위에 있던 우주의 무(Nothing)에서 말씀하신대로 빛이 생겼다. 하나님께서는 언어라는 수단으로 인간과 교통하신다. 하나님의 언어를 계시(啓示)라고 한다. 하나님의 계시를 언어로 기록한 것이 성경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이루어졌고 이루어지고 또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이 언어의 능력이다. 그런데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셨다”(창 1:26)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 한 가지만 예를 들면 “언어”(言語)를 닮게 하셨다. 언어를 소통의 도구로 주신 것이다. 오직 인간에게만 언어가 있어 소통하고 기록하여 역사가 있고 문명이 있다. 그러므로 “언어”는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말로 사람을 살릴수도 있고 죽일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말은 씨앗과 같고 씨앗은 반드시 뿌린대로 거두게 되는 이치와 같다.
하나님은 언어를 주시고 인간과 교통하신다. 인간의 역사도 언어로 기록된다. 한가지 역사가들이 새롭게 발견한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인간이 말하는대로 인류역사가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카르마의 법칙”에 비유한다. 카르마(Karma)란 무엇인가? 카르마는 어떤 원인에 대한 행동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그것은 뉴턴의 법칙인 “모든 행동은 반응을 가져야 한다”는 법칙과 같다. 원인이 있으니까 사과가 떨어진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동할 때, 우리는 그에 맞춰서 반응하게 될 힘을 일으킨다. 이 되돌아오는 반응의 힘을 결코 없앨 수 없다. 사람들은 자신이 저지른 행동의 결과를 결코 탈출할 수는 없다. 이것을 다른 말로 인과응보(因果應報: Law of Cause and Effect)라고 한다.
인과응보는 “뿌린대로 거두리라(As you sow, so shall you reap)”는 말과 같다. 만일 우리가 원하는 것이 행복, 평화, 사랑, 우정이라면, 우리는 행복하고, 평화롭고, 사랑에 가득한 말을 하고 행동해야 한다. 우리의 말을 우주에 내어 놓으면 반드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8-9) 그러므로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불평을 뿌리지 말고 긍정을 뿌려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잘 되고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문제는 원하는대로 말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이다.
인간의 삶은 그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우주의 법칙에 따라 산다.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를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은 우주를 통치하신다. 우주라는 “Cosmos”라는 단어는 “질서를 지켜간다”는 말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우주의 법칙 안에서 살아야 한다. 우주가 없으면 나도 없다. 우주는 내가 없어도 그대로 존재한다. 여기서 지혜를 발견해야 한다. 만약 당신이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한다면, 당신은 뭔가를 바꿀 수 없다. 카르마의 법칙에 보면 “당신이 가는 곳마다, 당신이 있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말은 “당신이 가는 곳 마다 당신은 우주 안에 있다”는 말과 같다. 내 삶에 뭔가 잘못된 일이 일어났다면 나로부터 뭔가 잘못된 원인이 있었다. 그 잘못은 곧 나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뜻이다. 누구의 잘못이든 어떤 이유에서든 어려움과 고통이 왔을 때, 고통과 어려움을 반전시키려면 언어의 능력을 사용해야 한다. 원망과 불평의 언어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어느 목사가 설교 중에 “누가 죽겠다, 죽겠다 하면 마귀가 그 소리를 듣고 득달같이 달려 온다”고 재미있는 비유를 했다. “왜 그러냐?”고 묻자, “마귀가 자기를 부르는 줄 알고 달려온다”는 것이다. 흘려 넘길 비유가 아니라 의미있는 비유라고 생각한다.
인과응보(因果應報)는 우주의 법칙이다. 인간의 언어는 능력이 있다. 뿌리는대로 거두는 법칙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려고 한다. 이집트의 홍해에서 출발하여 이스라엘 가나안까지 사막길을 걸어 가면 최소 일주일에서 최대 열흘길이면 갈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길을 무려 40년간이나 걸렸다는 사실이다. 40년전에 이집트를 출발했던 1세대는 다 광야에서 죽었고 2세대들을 통해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 왜 그랬을까? 성경은 분명하게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 때문이라고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출발한지 5-6개월만에 가나안 땅 앞에 도착하여 12지파의 대표를 선발하여 12명의 정탐꾼들을 40일동안 정탐을 하도록 했다(민 13). 땅을 점령하려면 당연한 조치였다. 40일 후에 그들이 돌아왔다. 12명 중 10명은 부정적이었으며 단 두 사람만 긍정적인 보고를 했다. 다수의 부정성 때문에 온 백성들이 원망과 불평이 하늘을 찔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길을 가다가 먹을 것이 없고 마실 물이 없어 날마다 불평과 원망을 했다(민 14). 불평한 사람들은 이래도 불평하고 저래도 불평한다. 사람이 살다보면 어려운 순간도 있고 고난의 날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불평과 원망은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불평과 원망을 듣고 “내가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민 14:28)고 하셨다. 그래서 “40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33)고 하셨다. 왜 하필 40년인가? “가나안 땅을 정탐한 날 수인 40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40년으로 죄악을 담당 시켰다.”(34) 결론은 불평과 원망의 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40년간을 방황했다는 말이다. 이것이 원망과 불평에 대한 말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라.”(벧전 3:10)고 했다. 좋은 말을 뿌리면 장래의 좋은 날이 온다는 뜻이다. 이것이 우주법칙(宇宙法則)이다. 이것이 창조질서(創造秩序)이다. 이것이 인과응보(因果應報)이다. 뿌리는 대로 거두는 법칙이다. 보상법칙(報償法則)이다. 원인결과(原因結果)의 법칙이다. 인간의 언어에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좋은 능력을 가지고 어리석은 인생을 살지 말고 지혜로운 인생을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