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칼럼

성숙한 신자는 감사하는 신자

Author
admin
Date
2016-01-10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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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실한 그리스도인 한 농부가 지방의 유명인사들과 함께 초청을 받아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식탁에는 맛잇는 임식들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이 농부는 으례하던 대로 음식을 앞에 놓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러자 앞에 앉아 있던 한 유명인사가 못마땅하는듯이 "허허, 구식이군요, 나도 교회 다닌 사람이지만, 요즈음 그리스도인은 식사하기전에 그렇게 기도하지 않아요. 그냥 마음 속으로만 하죠.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좀 생각해야죠"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 농부는 "그래요? 저는 그저 기도하는 습관 때문에 늘 감사 기도를 드리고 식사를 한답니다. 그런데 우리 농장에도 식사전에 기도 드리지 않는 이들이 많지요." 라고 말했다.
유명 인사는 "아, 그래요, 그것 참 지각있고 품위있는 사람같군요. 그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하고 묻자, 농부는 "우리 집에서 기르는 돼지들이에요. 그놈들은 감사하기는커녕 그져 자기 주둥이만 먼저 내밀고 먼저 먹으려고만 하지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짐승과 같다는 이야기이다.

매년 11월26일 목요일은 추수감사절이다.
추수감사절에 대한 유래는 이렇다.
영국에서 혹독한 신앙의 박해를 받고 "순례의 길"을 떠났던 청교도들은 폴란드로 떠나 암스텔담과 랑덴에서 얼마동안 신앙의 자유를 누리며 살았다.
엘리자베스 1세가 여왕으로 즉위하자(1558) 타향살이를 청산하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청교도인들을 더욱 심한 박해를 하며 영국 땅에 청교도들의 정착을 허락하지 않았다.
청교도인들에 대한 핍박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날로 심해졌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고국 땅에 정착하지 못하고 다시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갈 것을 결심하였다.
1620년 9월 29일 승객은 남자 73명과 여자 29명(총 102명)과 승무원 30명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의 작은 항구 호리어스항을 떠났다.
2개월만에 모진 풍파를 헤치고 죽음의 고난의 항해 끝에 1620년 11월21일 메사추세츠 주 케이프카드에 도착했다.
많은 사람들이 대서양을 건너오는 도중에 목숨을 잃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추운 겨울이었다.
이들은 굶주림과 추위, 그리고 인디안의 습격에 대한 공포 속에서 첫해 겨울을 보내면서 거의 반수가 괴혈병, 폐렴 등을 질병에 걸려 죽었다.
도착한지 석달만에 50명이 세상을 떠나고 봄이 오기 전까지 어떤 때는 매일 2,3명씩 죽어갔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개척의 의지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있다는 일념으로 윌리암 브래드포드(William Bradford)의 지도 아래 정착을 시작하여 열심히 개척하였다.

1621년 3월 이후에는 인디언들과 청교도들 사이에 분쟁도 있었으나, 상호 협력 및 불가침 조약을 맺은 이후 인디안들로부터 옥수수와 밀, 경작법 등 많은 도움을 받았다.
특히 청교도들이 양식이 부족해서 일 주일에 3일씩 금식을 하며 어렵게 지낼 때는 인디안들이 짐승들을 잡아다 주기도 해서 연명 해 나갈 수가 있었다.

가을이 되어 그들이 심은 옥수수와 보리, 밀 등이 풍작을 이루었고 가을추수를 하였다.
이를 기억하기 위해 청교도들은 지도자 브래드포드는 인디안들과 함께 최초의 "추수감사절"을 지키며 축하하기로 하고 인디안 추장 마사소이드를 초청했다.
마사소이드 추장은 90명의 용사를 데리고 참석하였다.
이날 청교도들은 들새를 잡으러 나가서 많은 칠면조를 잡았고, 인디안들은 사냥을 해서 다섯마리의 사슴을 잡았다.
그 후로 추수감사에는 칠면조 요리를 먹는 전통이 생겼다.

청교도인들은 인디안들과 아울러 모여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며 기뻐하였다.
청교도들이 바라던 신앙의 자유를 감사했다.